고통을 참는 수술의 시대
마취제가 없던 시대, 외과수술은 고통을 견디는 일이었다. 환자는 온전한 의식 아래서 살을 절개당했고, 진통제라야 술이나 아편 정도에 불과했다. 신체를 묶고 비명을 억누른 채 수술대에 오른 이들은 통증과 출혈뿐 아니라 극심한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외과의사의 실력은 수술의 정밀함보다 얼마나 빠르게 절단할 수 있느냐로 평가받았다. 수술은 의학이라기보다 생존을 건 처치에 가까웠다.
에테르의 등장, 의식을 지우다
1846년, 미국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William T. G. Morton)은 외과수술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는 화학물질 에테르(ether)를 환자에게 흡입시켜 의식을 잃게 한 뒤 턱 수술을 진행했고,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 공개 시술은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의사들과 과학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에테르는 ‘마취제’로서 세계 각국의 수술실로 퍼져나갔다. 환자의 고통을 제거한다는 발상은 외과수술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외과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디는 일이 아닌, 치유의 과학으로 전환되었다.
클로로포름, 왕실이 선택한 마취제
에테르에 이어 주목받은 물질은 클로로포름(chloroform)이었다. 1831년에 발견된 이 물질은 1847년 스코틀랜드 의사 제임스 영 심프슨(James Young Simpson)에 의해 출산 시 마취제로 도입되었다. 클로로포름은 에테르보다 냄새가 덜 자극적이고 작용이 빨라 여성 환자에게 유용했으며, 특히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이 출산 중 이를 사용하면서 대중적 신뢰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클로로포름은 심장 독성이 강해 사용 중 심정지 사고도 발생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뒤부아 기계(Dubois apparatus)와 같은 장치가 개발되었고, 클로로포름과 공기를 일정 비율로 혼합해 보다 안전하게 흡입할 수 있게 되었다.
마취의 작동 원리
마취제는 단순히 잠을 자게 만드는 약물이 아니다. 전신마취는 뇌의 특정 부위 ‒ 대뇌 피질, 시상, 해마 ‒ 를 일시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의식, 통각, 기억, 반응 능력을 차단한다. 이 과정은 약물의 약리작용과 신경전달물질의 변화에 따라 정밀하게 이루어진다.
흡입형 마취제는 폐를 통해 혈액으로 흡수된 뒤 뇌에 작용하고, 정맥주사형 마취제는 투여 즉시 혈류를 통해 전신에 퍼진다. 현대 마취는 단일 약물이 아나라 수면유도제, 진통제, 근육이완제를 조합한 ‘마취 칵테일’ 방식으로 시행된다. 이는 환자의 생리적 반응을 안정시키고, 수술 전후의 회복을 빠르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국소에서 전신까지, 확장된 기술
마취 기술의 진보는 전신마취뿐 아니라 국소마취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1903년, 프랑스 화학자 에르네스트 푸르노(Ernest Fourneau)는 인류 최초의 합성 국소마취제인 아밀로카인(amylocaine)을 개발했다. 이 약물은 신경말단에서 나트륨 이온 통로를 차단해 통증 신호가 중추로 전달되지 않게 한다.
현대의 치과치료, 피부 봉합, 작은 수술에는 이와 유사한 작용 원리의 국소마취제가 널리 사용된다. 반면 전신마취는 폐기능, 혈압, 뇌파까지 조절해야 하기에 마취 전문의의 모니터링 없이는 시행될 수 없다.
의식을 끈다는 것의 의미
마취제는 단지 수술의 고통을 줄여준 약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을 약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명과학 전반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오늘날의 외과수술, 장기이식, 암 절제, 심장 개복술 등은 대부분 환자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행된다. 마취 없이는 그 어떤 정밀 수술도 성립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마취 연구는 수면제, 항불안제, 항우울제 등 정신과 약물의 발달에도 기초가 되었다. 의학은 물리적 절단을 넘어서 생리적 상태를 조절하는 과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마취는 그 길목에 있었던 조용한 혁명이었다.
마취를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2007년 개봉작 『Awake』는 심장수술을 받던 환자가 마취는 되었지만 의식은 깨어 있는, 이른바 ‘수술 중 자각(Intraoperative Awareness)’ 상태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몸을 움직일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채로 수술의 고통과 주변 대화를 모두 느끼며, 자신을 해하려는 누군가의 계획까지 알게 된다. 단순한 의학적 체험을 넘어 고립상태에서 벌어지는 의료범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릴러다.
『Awake』는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스릴러지만 완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수술 중 자각은 약 1만 명 중 1명꼴로 보고되는 매우 드문 현상으로 실제로 일부 환자들은 통증, 대화, 무력감을 기억하기도 한다. 영화처럼 고통이 극심한 상황에서 심박이 급격히 상승하거나, 자율신경계가 과도하게 반응하면 쇼크나 부정맥과 같은 생리적 위험이 발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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