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매운 것과 나, 상극의 관계
나는 고추 소리만 들어도 땀이 난다. 먼저 확 더운 기운이 나고 땀이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 매운 음식이 들어오면 온몸이 본격적인 반응을 시작한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코가 맵고, 혀가 아리다 못해 얼얼하다. 그러다 보면 음식 맛은 고사하고 물만 찾게 된다. 되물릴 수도 없다. 이렇게 매울줄 몰랐다 후회해도 샹황은 대략 난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 감각을 즐기는 것 같다. 심지어 일부러 더 매운 것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2. 사람마다 다른 반응의 이유
이런 반응은 단지 취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 속에 무언가 다른 생리적 혹은 심리적 이유가 있는 걸까?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화합물 때문이다. 이 물질은 혀의 통각 수용체에 결합해 '뜨겁다'는 신호를 뇌로 보낸다. 실제로는 온도가 높지 않아도 몸은 열을 느낀 것처럼 반응한다. 땀이 나고, 심장이 빨라지고, 침이 마른다. 생리적으로 보면 이건 불쾌한 감각에 가깝다.
하지만 몸은 이 감각을 완화하려고 때로는 쾌락물질을 분비한다. 엔도르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은 고통을 줄이는 동시에 가벼운 만족감을 준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매운맛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즐기게 된다.

3. 고추는 어떻게 매운맛을 갖게 되었나
고추는 과일이다. 식물 분류상으로는 가지과에 속하며 토마토, 감자, 가지 등과 같은 무리다. 그중에서도 캡시쿰(Capsicum)이라는 속에 속한 여러 품종이 고추류에 해당한다. 피망처럼 순한 것부터, 트리니다드 모르가 스콜피온이나 캐롤라이나 리퍼처럼 극단적인 매운맛을 가진 품종까지 다양하다.
이 매운맛은 고추의 유전자, 자라는 환경, 익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더운 환경이나 물이 부족한 조건에서 자란 고추는 더 매워지는 경향이 있다. 익으면서 색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는 동안 매운맛도 강해진다.
4. 씨앗을 지키는 식물의 전략
캡사이신은 주로 씨앗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씨앗은 고추가 다음 세대를 퍼뜨리는 데 꼭 필요한 존재다. 포유류는 고추를 씹으면서 씨앗을 부숴버릴 수 있다. 고추는 그런 위협을 막기 위해 혀를 자극하는 화합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새는 다르다. 고추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켜 씨앗을 멀리 퍼뜨려 준다. 조류는 캡사이신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추 입장에서는 새는 내쫓을 필요가 없는, 오히려 고마운 존재다.
이런 정교한 반응 차이는 고추가 오랜 시간 진화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5. 인간은 왜 고통을 반복할까
인간은 매운맛을 피하지 않고, 그 자극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 말은 곧 이 매운맛을 ‘견디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향신료가 많이 쓰이는 지역은 대체로 덥고, 음식이 쉽게 상하는 환경이었다. 향신료의 살균작용은 그런 환경에서 실제로 유용했다. 고추는 그렇게 실용적 이유로 받아들여졌고, 시간이 지나며 문화와 음식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오늘날 매운 음식은 취향의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생존, 진화, 감각의 습관화 같은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단순히 고통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자극에 적응하면서 즐기는 방식으로 발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6. 같은 자극, 다른 경험
이 글을 쓰는 동안 몇 차례 뺨 위로 흘러내린 땀을 씻어냈다. 고추에 대해서 생각만 했는데도 이미 내 몸은 확실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오히려 그런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캡사이신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고, 반복된 경험을 통해 몸이 익숙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감각의 조건화, 뇌의 보상 작용, 문화적 배경 같은 요소가 함께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같은 자극을 받아도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고추는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조미료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도 조심스런 경계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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