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이야기

물아이, 위로받지 못한 생명을 부르는 말

Egaldudu 2025. 5. 2. 11:18

도쿄 미나토구 조조지 절의 묘지에 있는 지조(지장보살) 석상들 (사진: Gorgo,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일본에는 낙태되거나 유산된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전통이 있다. 이 아이들은 때로 "물아이(水子, みずこ)"라고 불린다. 문자 그대로는 "물의 아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태어나지 못한 생명을 부드럽게 지칭하면서, 동시에 책임이나 논란을 비켜가려는 문화적 거리감을 함축하고 있다. 일본사회는 이런 존재들을 달래기 위해 종교적 형식과 상징을 만들어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즈코쿠요(水子供養)'.

 

'미즈코'라는 말, 그 어원에 대한 여러 해석

'미즈코(水子)'라는'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가장 흔한 설명은 문자 그대로 '()' '아이()'의 결합으로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물처럼 흘러가 버렸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일본어의 부정형 접두어 '미즈(見ず, 보지 않다)'에서 비롯된 '보지 못한 아이(見ず子)'라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하며, 고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에 버려진 신적 존재인 '히루코(水蛭子)'와 연결짓는 설화적 관점도 존재한다. 어원은 단일하지 않으며, 상징성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이런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불교 의식은 미즈코쿠요(水子供養)라 불린다. 유산·낙태·사산 등으로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명복을 비는 이 의식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일본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는 단지 전통이 유지된 결과가 아니라 낙태 수치 증가, 기존 사찰의 경제위기, 신흥종교의 영향, 위령산업의 발전 등 복합적 사회변동과 연결되어 있다.

 

미즈코쿠요는 많은 경우 특정한 사찰에서 정해진 비용을 받고 진행된다. 기도문 낭독, 위패 봉헌, 소형 지장보살 조형물 설치 등이 포함되며, 온라인 접수 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다. 이 구조는 유족에게는 정서적 위안이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고통이 체계화되고 소비되는 구조를 드러낸다. 일본사회는 생명을 잃은 이들에게 '위로'라는 이름으로 의례를 제공하지만, 그 이면에는 상품화된 감정의 거래가 존재한다.

 

지장보살, 죽은 아이를 위한 장치

지장보살은 일본 불교에서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 여겨진다. 특히 죽은 아이들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지장보살은, 미즈코쿠요에서 "미즈코지조(水子地)"라는 형태로 자주 등장한다. 이 지장보살은 아기처럼 조형된 석상으로 표현되며, 빨간 턱받이와 모자를 쓴 모습으로 일본의 여러 사찰이나 산자락에 수십, 수백 기씩 줄지어 세워져 있는 경우도 있다.

 

동자승을 닮은 그 석상들은 반복되는 모양과 표정을 하고 있다. 빨간 천, 바람개비, 장난감, 아기 신발. 겉으로 보면 슬픔을 모은 듯한 공간이지만, 일정한 형식으로 배치된 그것들은 오히려 감정을 전시 가능한 장식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지장보살상 앞에서 부모는 아이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놓거나, 조용히 기도문을 읽는다. 그러나 이 기도 속에는 단지 개인의 위로만이 아닌, 사회가 부과한 죄책감의 무게도 스며 있다. 슬픔은 진심일 수 있으나 그 감정을 감싸는 장치들은 어딘가 계산적이다.

 

시스템이 된 위령, 소비되는 감정

오늘날의 미즈코쿠요는 종교적 의례인 동시에 하나의 산업이다. 일정한 비용구조와 절차, 심지어 디지털 플랫폼을 갖춘 이 위령의식은 상업과 신앙의 경계에 있다. 유족의 감정은 구조화되고, 고통은 가격표를 달고 소비된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은 기능한다. 유산이나 낙태는 사회적으로 쉽게 말할 수 없는 주제이며, 그 감정을 어디에도 두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의식은 한 갈래의 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출구가 정해진 방식과 비용 안에서만 허용될 때 그것은 감정의 표현이 아닌 감정의 상품화에 가깝다.

 

미즈코쿠요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앙의 형태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여성의 죄책감을 자극해 이윤을 추구하는 구조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전통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문화적 감수성을 뜻하지만 때로는 검열되지 않는 합리화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문화인가 위로인가, 감정의 형식화에 대하여

'물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을 부드럽게 말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는 철저한 거리감이 내포돼 있다. 물처럼 흘러가 버렸다는 말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서술이 되기도 한다.

 

일본사회는 이런 감정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형식을 만든다. 옷을 입히고, 인형을 놓고, 이름을 부르고, 붉은 천을 두른다. 이 반복된 행위는 감정을 정돈하고, 죄책감을 제도 속으로 흡수한다. 그것은 개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의 무언가를 미루고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문화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특히 감정을 다루는 문화일수록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고 반복되며 관리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미즈코쿠요는 죽은 생명을 위로하는 장치이자 그 감정 자체를 소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그렇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미화하기보다 구조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