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 이야기

땅속에 피는 난초, 리잔텔라(Rhizanthella)

Egaldudu 2025. 6. 23. 21:31

리잔텔라 존스토니이(Rhizanthella johnstonii) – 동부지하난초

By Jean and Fred from Australia, CC BY 2.0, wikimedia commons. (modified by Egaldudu)

 

지상으로 일부를 밀어올리는 꽃

리잔텔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난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화려한 꽃잎도, 햇빛 아래에서 자라나는 잎도 없다. 이 식물은 전 생애를 땅속에서 보내며, 꽃마저 땅 속에서 피어 그 일부만 흙을 밀고 지상으로 드러난다. 이만하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난초라 할 만하다.

 

광합성을 포기한 식물

이 식물의 가장 독특한 점은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엽록소가 거의 퇴화된 상태이며, 잎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리잔텔라는 말레루카(Melaleuca)류 관목의 뿌리와 공생하는 곰팡이로부터 양분을 간접적으로 공급받는다. 식물이 곰팡이에 기생하고, 곰팡이는 다시 숙주 식물의 뿌리와 연결된 구조다. 이 복잡한 삼자관계는 '균근 기생(mycoheterotrophy)'이라는 특수한 생존방식의 전형적인 사례다.

 

리잔텔라 가드네리와 존스토니이

1928년 서호주에서 처음 발견된 Rhizanthella gardneri는 리잔텔라 속 최초의 종으로 기록된다. 이 종은 건조하고 모래가 많은 관목지대에서 발견되며, 하나의 꽃줄기 안에 최대 100개에 이르는 작은 꽃이 밀집하여 피어난다. 이에 비해 Rhizanthella johnstonii는 퀸즐랜드의 습윤한 유칼립투스 숲에서 1979년에야 표본이 채집되었고, 정식으로 학계에 기술된 것은 2018년의 일이다.

 

두 종 모두 공통적으로 지하 생활에 철저히 특화되어 있으며, 수분 역시 지하 곤충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흰개미나 유기물층에 서식하는 곤충들이 꽃을 찾아와 꽃가루를 옮기는 과정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메커니즘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땅속이라는 전략

빛이 전혀 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해 진화한 리잔텔라는보이지 않음을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거친 기후 조건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극단적으로 특화된 생존방식은 외부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뿌리, 곰팡이, 숙주 식물 사이의 균형이 조금만 무너져도 생존이 어려워진다.

 

리잔텔라는 독특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진화한 난초이며, 우리가 식물이라는 범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꽃은 피되 드러나지 않고, 살아 있으되 햇빛을 거부하는 생명체. 리잔텔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적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