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용어들

달려야 제자리다: '붉은 여왕 가설' 이야기

Egaldudu 2025. 6. 28. 15:20

“Now, here, you see, it takes all the running you can do,

to keep in the same place.”

 

"여기서는 제자리에 있으려면 계속 달려야 해."

붉은 여왕이 앨리스의 손을 붙잡고 함께 달리는 장면. 『거울나라의 앨리스』 삽화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속 붉은 여왕의 이 말은 원래 동화의 기묘한 설정처럼 들린다. 하지만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이 말은 냉정한 현실을 상징하는 핵심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바로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이다.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

1973, 진화생물학자 리 반 발렌(Leigh Van Valen)은 생물종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다. 환경은 변하고, 경쟁자는 진화하며, 병원체는 돌연변이를 거듭한다. 이 흐름 속에서 멈추는 종은 도태된다.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의 핵심은 단순하다. "진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 그 자체다." 생존을 위해 변화를 멈추는 순간,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경쟁자에게 밀리거나 멸종을 피할 수 없다.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상호 진화의 구조

생명체는 결코 고립되어 진화하지 않는다. 포식자는 더 효율적으로 사냥하려 진화하고, 피식자는 더 빠르게 도망치거나 위장을 강화한다. 숙주는 병원체의 침입을 막기 위해 면역시스템을 진화시키고, 병원체는 이를 뚫기 위해 더 교묘한 전략을 개발한다.

 

이것이 공진화(co-evolution). 붉은 여왕 가설은 모든 생명체가 이 끝없는 진화 경쟁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가령, 토끼가 점점 더 빨라진다고 가정해보자. 포식자인 여우 역시 그에 맞서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사냥에 실패한다. 이처럼 경쟁 종 간의 상호 진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진화의 경쟁, 우위는 없다

이 가설이 흥미로운 이유는 끊임없는 진화에도 절대적인 우위를 얻기 어렵다는 데 있다. '발전'이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구조다. 생존을 위해 달리는 동안 모두가 함께 달리기에 종 전체의 상대적 위치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결국, 달려야 겨우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 멈추는 순간 낙오하는 것이다.

 

성적 생식의 미스터리와 붉은 여왕

진화생물학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성적 생식(sexual reproduction)의 유지 이유다. 무성 생식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데도 왜 대부분의 고등생물은 여전히 유전자 절반을 섞어 후손을 남길까?

 

붉은 여왕 가설은 이 미스터리의 이해하는데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유전자 조합을 바꾸는 성적 생식은 환경변화와 기생충, 병원체의 진화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변화하는 적에 맞서려면 스스로도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성적 생식은 붉은 여왕 가설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쟁 없는 진화는 없다

붉은 여왕 가설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한 진화 이야기를 넘어선다. 모든 생명체가 고립된 발전을 이루는 게 아니라, 서로 밀고 당기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남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조는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 기술, 경제 시스템을 바라보는 렌즈로도 확장할 수 있다. 한 분야에서 멈추거나 느슨해지면, 더 빠르게 변화하는 상대에게 뒤처진다. 붉은 여왕 가설은 단순히 자연 속 이론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경쟁구조에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이다.

 

멈추면 끝이다

붉은 여왕 가설은 단순한 과학이론을 넘어, 냉정한 현실의 은유다.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진화도, 경쟁도, 환경도 쉬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하나다. 계속 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 달리기가 꼭 더 빠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유연하게, 더 전략적으로, 더 다양하게 변해야 한다. 멈추는 순간 경쟁에서 뒤처지고, 변화 없는 생명은 사라진다.

 

붉은 여왕이 말한 '제자리에 있기 위한 달리기'는 결국 생존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변화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며, 그 끝없는 경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선택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