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이 오르면, 마음도 들뜬다
어느 날 갑자기 집값이 몇 억 원 올랐다. 주식도 제법 수익을 내고 있고, 은행 잔고도 늘어났다. 월급은 그대로인데도 묘한 여유가 생긴다. 평소라면 망설였을 지출에도 지갑이 쉽게 열린다. 이처럼 실질소득이 늘지 않았는데도 소비성향이 커지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부의 효과(wealth effect)’라고 부른다.
이 효과는 개인이 체감하는 부(富)가 자산의 장부가치, 즉 주식 평가액이나 부동산 시세, 혹은 암호화폐의 시가 총액 등에 의해 좌우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는 현금화되지 않은 ‘잠재적 부’일 뿐, 실제 지출능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착각이 소비 행태와 경제 전반에 상당히 실제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착시로 인한 소비, 그 대가는 컸다
2000년대 중반, 미국은 전형적인 부의 효과 함정에 빠졌다. 부동산 시장의 가파른 상승세는 대중에게 '나는 더 부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이에 따라 신용을 기반으로 한 소비가 급격히 늘었다. 주택을 담보로 한 ‘홈에쿼티론(Home Equity Loan)’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소비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허상 위에 지어진 풍요였다. 2007년 이후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담보 가치는 무너졌고, 남은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뿐이었다. 금융기관들은 파산하고, 가계는 소비를 줄이며 빚을 갚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국면에 진입했다. 대침체(Great Recession)라 불리는 이 시기는 단순한 경기침체가 아니라, 부의 효과가 불러온 착각이 어떻게 실물 경제를 휘청이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느낌’보다 ‘현실’을 보자
사람들이 소비를 늘리는 요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처분 소득(disposable income)의 증가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 부유감이다. 후자는 정서적 동기지만 경제활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요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심리가 자산 가격의 변동에 따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데 있다.
2008년 1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6%가 ‘생활 수준이 좋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44%는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고 답했다. 자산 가격의 하락은 심리적 부유감을 약화시켰고, 이는 소비 감소로 이어졌다. 이처럼 심리적 자산 착시는 경기 과열기에는 과소비를 유발하고, 침체기에는 공포 심리를 증폭시켜 경제 전반을 더욱 흔든다.
숫자에 기대어 삶을 설계하지 않기
자산이 늘었다고 해서 곧바로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다. 넓은 집, 고급 자동차, 잦은 외식과 여행 등은 ‘생활의 기준점’을 높이는 소비로 작용한다. 이런 기준은 일단 올라가면 되돌리기 어렵고, 수입이 충분치 않다면 이는 곧 신용의존으로 이어진다.
소비 가능성(consumption capacity)은 ‘지금 얼마 있느냐’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얼마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자산이 상승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비 항목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노후, 교육비, 의료비처럼 예측 가능한 장기 지출 항목을 재점검하는 것이다.
부의 본질은 숫자가 아닌 지속 가능성에 있다
자산의 평가는 일시적이며 유동적이다. 특히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처럼 시장의 심리에 따라 급등락하는 자산은 확정되지 않은 이익일 뿐, 그 자체로는 유동성도, 실질 구매력도 보장하지 않는다.
진정한 부란 숫자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라, 현재의 소득과 확정된 자산 흐름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사는 삶이다. 시장이 들썩일수록 숫자에 취하지 않고 현실을 점검하는 것. 그것이 부의 효과가 초래하는 착시에서 벗어나 진짜 재정적 안정을 유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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