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하지 않는 장소’의 탄생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1516년 라틴어로 쓴 『최선의 공화국 체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단어는 라틴어로 표기되었지만, 그 구성은 고대 그리스어에 기반한다. ‘U’는 그리스어 ‘ou(οὐ)’, 즉 ‘없다’를 뜻하는 부정 접두사이고, ‘topos(τόπος)’는 ‘장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Utopia’는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한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좋다’를 의미하는 또 다른 그리스어 ‘eu(εὐ)’와 소리상 유사하여, ‘이상적인 장소’라는 긍정적 의미가 자연스럽게 덧씌워졌다. 이러한 어원적 중의성은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오용되거나 재해석되는 출발점이 되어 왔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이상국가’
관행적으로 ‘유토피아’라 불리는 이 책에 묘사된 섬나라는 평등한 재산 분배, 노동의 윤리, 종교의 자유, 심지어 하루 6시간 노동제까지 갖춘 이상사회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단순한 청사진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기도 했다.
사유재산과 계급, 종교 분열, 부패한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상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는 현실을 긍정하기 위해가 아니라,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해 탄생한 개념이었다

By N.N.,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유토피아의 이중성
이후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사회의 상징으로 확장되어,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철학에 흡수된다. 공산주의 이념에서의 ‘계급 없는 사회’, 19세기 미국에서 시도된 종교공동체 실험들, 20세기 초반의 계획도시 운동까지, 유토피아는 언제나 ‘지금 이곳’의 불만을 반영하며 나타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토피아는 위험한 환상으로도 여겨진다.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 –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처럼 – 자신들만의 ‘이상 사회’를 구축하려다 오히려 현실을 억압했던 사례는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디스토피아를 만든 전형이다.
‘유토피아’의 일상적 오용
오늘날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꿈’ 또는 ‘비현실적 이상’ 정도로 가볍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실현 여부보다 그것이 드러내는 결핍과 갈망에 주목하게 만드는 개념이었다. 유토피아는 “이렇게는 안 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어떻게?”를 묻는 상상력의 장치였던 셈이다.
유토피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테크노 유토피아, 그린 유토피아, 디지털 유토피아 등 새로운 형태의 ‘이상’들을 끊임없이 제안한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이러한 상상은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결국 유토피아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에 더 가깝다. 실현되지 않아도 반드시 필요한,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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