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 이야기

수다스런 고래, 벨루가 이야기

Egaldudu 2025. 9. 20. 00:48

벨루가(Delphinapterus leucas)는 북극과 그 주변 차가운 바다에 사는 흰 고래다. 독특한 외모와 다양한 목소리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바다의 카나리아’라고 불릴 만큼 소리 표현이 풍부하다. 하지만 벨루가의 진짜 매력은 단순히 귀여운 외모나 울음소리만이 아니라, 혹독한 극지 환경에 맞춰 진화한 놀라운 적응력과 복잡한 사회적 행동에 있다.

 

다양한 발성과 대화법

벨루가는 동물계에서도 손꼽히는 말 많은 고래다. 지저귐, 끙끙거림, 삐걱거림, 휘파람 등 수십 가지의 소리를 내며, 풍부한 발성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다. 이 다양한 소리는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무리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특히 얼음 밑이나 빛이 거의 닿지 않는 북극의 어두운 바닷속에서 소리는 벨루가 무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생존 도구이다.

 

흥미로운 점은 새끼 벨루가가 이 소리를 몇 년에 걸쳐 배운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처럼 벨루가 새끼들도 어른 개체의 발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며 점차 정확한 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벨루가 사회가 단순한 본능적 울음이 아니라, 학습과 문화적 전승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극에 특화된 생존 전략

벨루가라는 이름은 하얀색을 뜻하는 러시아어 벨릐(bélyi)에서 유래했다. 갓 태어난 상태에서는 회색을 띠지만 성장하면서 색소가 사라지고 눈처럼 하얗게 변한다. 이 흰 피부는 빙하 속에서 북극곰이나 범고래로부터 몸을 숨기는 데 탁월한 위장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벨루가에게는 다른 고래와 달리 등지느러미가 없다. 대신 낮게 솟은 융기부(능선)만이 자리하고 있어 얼음 밑을 부드럽게 헤엄치는데 편리하다.

 

무리를 지탱하는 어른의 지혜

국립공원 ‘러시아의 북극(Русская Арктика)에서 촬영된 벨루가 무리

By Kirill.uyutnov - Own work,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벨루가는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보통은 소규모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지만, 여름철 강 하구에서는 수백 마리가 모여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최근 연구에서는 벨루가 무리에서 혈연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인간 사회와 유사한 면모로, 협력과 교류가 생존에 큰 도움이 됨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벨루가 암컷이 폐경을 겪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 지구상에서 폐경이 확인된 동물은 단 다섯 종에 불과한데, 벨루가가 그중 하나다. 번식을 멈춘 암컷은 대신 후손과 무리를 돕는 역할을 하며, 이는 할머니 효과(grandmother effect)’라고 불린다. 이처럼 벨루가 사회는 단순한 동물 무리를 넘어서 복잡한 구조를 보여준다.

 

벨루가의 감각 시스템

벨루가의 멜론

By premier.gov.ru, CC BY 4.0, wikimedia commons.

 

벨루가의 둥근 이마에는멜론(melon)’이라 불리는 지방 조직이 있다. 이는 이빨고래류(odontoceti)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기관으로, 소리를 모아 특정 방향으로 집중시켜 발산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발산된 소리는 반향으로 되돌아오며, 벨루가는 이를 턱뼈와 내이를 통해 감지해 주변 환경을 해석한다. 이러한 과정을 생체 소나(biosonar)라고 부른다. 벨루가는 이 능력을 이용해 사냥감을 추적하거나, 얼음 속 숨구멍을 찾아내며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 살아간다.

 

마무리하며

벨루가는 풍부한 발성과 강한 사회적 유대, 그리고 극지에 특화된 신체 구조를 지닌 고래다. ‘바다의 카나리아라 불릴 만큼 수다스럽지만, 그 소리는 차갑고 어두운 북극의 얼음 밑에서 살아남기 위한 효과적 생존 전략이다.

 

벨루가는 소리를 통해 서로 소통하며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고, 협력과 돌봄 속에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동물적 본능을 넘어 어딘가 인간 사회와 닮아 있는 집단적 생태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