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teve Shook from Moscow, Idaho, USA, CC BY 2.0, wikimedia commons.
땅 위에 새겨진 고향의 이름
미국을 두고 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유럽에 있는 도시는 미국에도 다 있다." 처음에는 그저 농담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 지도를 펼쳐보면 그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된다. 파리, 아테네, 로마, 플로렌스, 베를린, 리스본 – 그 이름들이 북미 대륙 곳곳에 살아 있다. 마치 익숙한 유럽의 풍경이 낯선 신대륙 위에 비현실적으로 덧씌워진 듯하다.
이 기묘한 현상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776년,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자리 잡은 13개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며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지만, 이미 그 땅 위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유럽 강국들의 흔적이 뒤섞여 있었다. 독립 이후에도 미국은 서쪽으로 팽창하며 유럽 열강의 식민지를 흡수했고, 그렇게 지금의 광활한 영토가 완성됐다.
뉴잉글랜드에 남은 영국의 그림자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뉴잉글랜드(New England)'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 땅에 새겨진 영국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등 여섯 개 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외부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다. 덕분에 초기 영국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 있다.
이 지역 지도를 펼쳐보면 맨체스터(Manchester), 포트랜드(Portland), 보스턴(Boston), 댄버리(Danbury)처럼 영국 지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도시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영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름들이다. 고향을 떠나 새 땅에 정착했어도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애틋한 마음이 이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제로 뉴잉글랜드의 지도 곳곳에서는 영국에서 비롯된 지명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지도 위에 남은 유럽의 흔적
뉴잉글랜드만이 그런 건 아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 미국 전역을 들여다보면, 유럽의 흔적이 사방에 녹아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뉴욕(New York)은 영국의 요크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원래 이 땅은 네덜란드 식민지였고, 당시에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으로 불렸다. 영국이 점령한 뒤,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를 기리기 위해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미주리 주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루이지애나(Louisiana) 역시 같은 군주의 이름을 따왔다. 앨라배마 주의 플로렌스(Florence)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거지 피렌체를 떠올리게 한다. 남부의 도시들 중에는 애썬즈(Athens, 아테네)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곳도 여럿 있다. 고대 그리스 문명과 학문의 상징을 그대로 옮겨 온 셈이다.
미국의 주 이름 중에도 유럽의 흔적은 선명하다. 뉴저지(New Jersey), 버지니아(Virginia), 콜로라도(Colorado), 캘리포니아(California), 버몬트(Vermont), 몬태나(Montana) – 이 모두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라틴어의 어원을 간직하고 있다. 50개 주 가운데 약 20곳이 직접적으로 유럽과 연결된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선다.
이름은 그대로, 허나 달라진 풍경
By Tyler Ross, GFDL, wikimedia commons.
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은 미지의 신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야 했다. 낯선 땅에 정착하면서도 고향의 언어로 익숙한 이름을 남긴 이유는 분명하다. 파리, 아테네, 플로렌스, 로마 – 그 이름들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불안과 낯섦을 달래는 정신적 위안이자, 새 터전에 과거의 정체성을 심으려는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젠 이름만 같을 뿐, 그 속에 담긴 풍경과 문화는 세월이 흐르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됐다. 미국의 파리, 로마, 아테네는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질적인 현실을 품고 있다. 미국 속 유럽 지명들은 그렇게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품으며, 세월이 쌓인 새로운 땅 위에 미국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덧입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을 둘러보면 그 땅 위에 새겨진 유럽의 그림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름으로 남은 고향의 흔적, 그 이름들이 변형되고 혼합되며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 미국 속 유럽은 오늘도 그렇게, 과거와 현재, 이질성과 친숙함을 뒤섞으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기후환경지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르카토르(Mercator) 도법, 바다에서 탄생한 왜곡 (2) | 2025.06.26 |
---|---|
세상에 단 4개, '왕 없는 군주제' 공국과 대공국 이야기 (4) | 2025.06.25 |
흑해(Black Sea) – 검은 바다의 깊은 비밀 (3) | 2025.06.24 |
아랍(Arab)이란 무엇인가 – 언어, 민족, 그리고 그 이상 (3) | 2025.06.24 |
생태계를 위한 새로운 선택, ‘재자연화(rewilding)’ (7) | 2025.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