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완장
우리는 일상에서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완장 차더니 사람이 변했어.”
여기서 말하는 ‘완장’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상징이며, 역할의 무게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완장 하나로 행동의 방식, 말투,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바뀐다. 이러한 현상은 공식적인 심리학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완장 효과’라는 말로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용된다.
주차 안내 요원, 아파트 경비원, 학생회 임원, 군대 분대장 등등. 제도적으로 큰 권한을 가진 건 아니지만, 특정 상황에서 상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면 평범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완장 효과다.
문학 속, 윤흥길의 『완장』
이 심리를 가장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이 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1983)은 시골 마을에서 저수지 감시원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 한 남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감시권한 하나로 주변 사람들을 위압하고, 점차 권력의 환상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지만 ‘완장’을 찬 순간부터 스스로를 권위의 대변자로 착각한다. ‘작은 권력’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한 이 소설은 완장 효과를 단순한 풍자나 과장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심리적 실체로 그려낸다.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
이러한 문학적 통찰은 심리학에서 이미 실험적으로 뒷받침되었다. 1971년,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을 통해 권한과 역할이 인간의 행동을 얼마나 급격히 바꿀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대학생 지원자들이 무작위로 간수 역할과 수감자 역할을 맡았다. 간수 역할을 부여받은 학생들은 불과 며칠 만에 권위적이고 때로는 가학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수감자들은 우울, 무기력, 복종으로 무너져갔다.
이 실험은 원래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6일 째 되는 날 중단되었다. 짐바르도의 약혼자였던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라크가 실험현장을 보고, “당신은 지금 이 아이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는 분명했다. 사람의 성격이 악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역할이 악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권력의 무게
‘완장’은 제도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댓글 관리자, 단톡방 리더, 조별과제 조장, 익명 게시판의 인기 유저까지. 삶의 구석구석 어디에나 크고 작은 상징적 권위를 지닌 완장 효과는 존재한다. 그리고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완장을 차기전까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스탠퍼드 감옥실험은 이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간수 역할에 대한 사전 유도, 참가자의 연기적 태도, 연구자의 해석 개입 등의 정황이 지적되며, 실험의 신뢰성과 윤리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에서 확인된 것처럼, 실험 설계의 불완전함이 그 주제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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