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보다 중요한 건 ‘보이는 일’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는 척하는 사람이 더 돋보이는 시대다. 성과보다는 태도, 실력보다는 연출이 평가 기준이 되는 곳에서는 일 자체보다 일하는 ‘모습’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생겨난 개념이 퍼포먼스 노동이다. 일에 집중하는 대신,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일이다. SNS에 늦은 야근 사진을 올리고, 일부러 바쁜 척 회의 일정을 늘리는 행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2. 퍼포먼스 노동과 셀프 브랜딩의 등장
이 용어는 고전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연극적 접근(dramaturgical approach)’ 개념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비평적 표현이다. 그는 1956년 저서 『일상생활에서의 자기 표현(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에서 인간은 사회에서 끊임없이 ‘연기’하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퍼포먼스 노동은 이 개념이 현대 노동 환경, 특히 SNS 기반의 업무 문화 속으로 확장된 형태다.
이와 맞닿아 있는 것이 셀프 브랜딩이다.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처럼 포장하고, 연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단순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게 만드는 일이 커리어의 일부가 되었다. 포트폴리오를 꾸미고, SNS에 전문적인 이미지를 쌓으며, 때로는 본업보다 브랜딩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기도 한다.
이 개념은 미국 경영 전문가 톰 피터스(Tom Peters)가 『혁신기업 (Fast Company)』, 1997년 8월호에 기고한 「브랜드화된 당신 (The Brand Called You)」 라는 글에서 처음 제안했다. 그는 “당신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라고 말하며, 개인이 스스로를 마케팅해야 할 시대를 예견했다. 이 개념은 SNS와 콘텐츠 플랫폼이 확산된 2010년대 이후, 프리랜서와 직장인 모두에게 실전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3. 왜 이런 시대가 되었을까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던 시대는 끝났다.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프리랜서나 N잡러가 늘면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마케팅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똑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다름’은 종종 실력이 아닌, ‘보여지는 방식’에서 만들어진다.
또한 플랫폼의 영향도 크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은 누구나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무대다. 노출은 곧 수익으로 연결되며 유명세는 실질적인 경제적 자산이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콘텐츠화하고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4. 일상이 무대가 되다
직장인은 브이로그를 찍고 디자이너는 인스타에 작업과정을 올린다. 프리랜서는 자기 이름을 검색했을 때 멋지게 정리된 프로필이 나올 수 있도록 공들인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는 보기 힘든 ‘노동 외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경쟁력을 위한 기본활동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어 한 대기업 사원은 퇴근 후에도 생산성 앱 화면을 캡처해 SNS에 공유하고, 주말마다 업무 관련 책을 읽는 모습을 브이로그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다. 이런 행위는 실력의 표현이자 자기 자신을 꾸준히 시장에 노출시키는 전략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강사, 마케터, 개발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각자의 무대에서 자신을 알리고 있다. 성실해 보이는 이미지, 바쁜 일상, 전문적인 언어는 이제 ‘능력자’로 인식되는 필수요소가 되었다.
5. 자존감과 피로 사이
퍼포먼스 노동과 셀프 브랜딩은 때로 보람을 준다. 사람들의 반응은 성취감을 가져다주고, 자신을 가꾸는 과정에서 목표 의식이 생긴다. 콘텐츠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는 행위는 자기 발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보여주는 일’에 몰두할수록 현실의 자아와 온라인 속 이미지 사이에는 간극이 커진다.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위해 자극적인 연출을 반복하거나 쉬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하루라도 아무것도 올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반응이 줄어들면 괜히 자신이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정받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어느 순간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비교, 연출 피로, 자기 과잉의 번아웃은 이 시대의 보편적 후유증이 되고 있다.
6. 진짜 나를 잃지 않으려면
퍼포먼스 노동과 셀프 브랜딩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이기 위한 일’에 갇히면, 결국 나 자신이 소진된다. 중요한 건 진정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과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꾸준히 쌓아온 실력과 태도는 언젠가 드러난다.
자신을 알리고 연출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지만, 그 속에 있는 ‘진짜 나’를 지켜야 한다. SNS에 올리는 장면보다 화면 밖의 나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일과 이미지 사이, 연출과 진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생존 기술이다.
'이런저런 용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후경영의 시대: RE100, 넷제로, 탄소국경세 (0) | 2025.03.28 |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일과 재무전략: 긱 이코노미, N잡러, 파이어족 (0) | 2025.03.27 |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정의인가, 디지털 사냥인가 (2) | 2025.03.26 |
디지털 시대의 문화 전염: 밈(Meme), 바이럴(viral), 리믹스(remix) (1) | 2025.03.26 |
뉴럴링크(Neuralink): 생각으로 기계를 움직이다 (0) | 202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