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에 담긴 오해
두더지는 중세영어에서 ‘moldewarp’라 불렸다. 흙(mould)과 비틀다(warp)라는 말이 결합된 이 단어는 ‘흙을 움직이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영어에서는 이 의미가 사라지고 단지 ‘mole’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반면 독일어의 ‘Maulwurf(마울부르프)’에는 고대어 ‘muwurf’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자 그대로 ‘입으로 던지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두더지가 주둥이로 흙을 퍼올린다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굴을 파는 건 입이 아니다
두더지의 주둥이는 굴을 파는 도구가 아니다. 시각이 퇴화한 대신 주둥이와 그 주변의 감각 털은 지하환경에서 방향을 감지하는 정밀한 촉각기관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흙을 퍼올리는 건 앞다리다. 두더지의 앞다리는 측면으로 벌어져 있고, 넓은 손바닥과 날카로운 발톱, 강화된 어깨와 팔 근육을 갖추고 있다. 팔꿈치 아래의 두 뼈는 서로 붙어 있으며, 손바닥은 ‘여섯 번째 손가락’ 역할을 하는 추가 뼈 덕분에 더 넓다.
이 모든 구조는 굴착에 최적화된 결과이다. ‘입으로 던지는 자’라는 이름은 이런 생물학적 구조와 어울리지 않는다.
땅속 생존을 위한 진화
두더지는 지상보다 땅속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생애는 빛 없는 지하에서 이루어지며, 이에 적응해 시각 대신 청각과 촉각이 주요 감각으로 발달했다. 굴은 이동 통로일 뿐 아니라, 먹이 사냥, 번식, 휴식이 모두 이루어지는 생활 공간이다.
먹이는 주로 지렁이와 곤충 유충이다. 두더지는 굴 안에 들어온 지렁이를 죽이지 않고 마비시켜 저장해 두기도 한다. 입과 이빨은 작지만 매우 정밀하며, 두더지귀뚜라미, 민달팽이 같은 해충도 사냥 대상이다. 물론 유익한 지렁이도 일부 포식하지만, 생태계 전체로 보면 두더지는 해충 개체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더지는 종종 해충으로 오해받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밭이나 화단 밑으로 굴을 파 상추 뿌리를 건드리거나, 잔디밭 위에 흙더미를 만들어 미관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는 제한적이며, 생태계 전반으로 보면 두더지는 해로운 존재라기보다 균형을 조절하는 존재에 가깝다.
혼자 사는 두더지의 리듬
두더지는 철저히 단독 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한 마리가 차지하는 굴의 면적은 꽤 넓고, 다른 개체와의 접촉은 번식기를 제외하고 거의 없다. 영역이 겹칠 경우 치열하게 싸우기도 한다.
두더지는 포유류지만 낮과 밤이라는 시간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하생활의 특성상, 일정한 생체리듬 대신 몇 시간 단위로 반복되는 짧은 수면과 활동주기를 따른다. 이를 ‘울트라디언 리듬’이라고 하며, 어둠 속 생존에 최적화된 방식이다.
눈은 있지만 보지는 않는다
두더지는 흔히 ‘눈이 먼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히 실명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두더지의 눈은 보송보송한 털 아래에 가려진 작은 단추 형태로, 밝고 어두움을 구분하는 정도의 기능만 유지하고 있다.
망막에는 색을 구분하는 원뿔세포(cone cells)가 거의 없고, 밝기만 감지할 수 있는 막대세포(rod cells)만 있다. 이로 인해 색 인식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형태를 구분하는 능력도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두더지는 시각이 아닌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특히 코와 감각수염은 매우 민감하여 전혀 빛이 없는 환경에서도 방향을 잡고 먹이를 탐색할 수 있게 해준다.
흥미롭게도 영어에서 ‘mole’은 두더지를 뜻할 뿐 아니라 첩자나 스파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홀로 활동하고, 보이지 않는 땅속 경로를 파고드는 두더지의 습성이 조직 내부에 숨어 정보를 빼내는 이중스파이의 이미지와 겹쳐진 것이다. 생태 속 행동이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는 다시 인간사회 속 은유로 자리잡은 셈이다.
'동식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흰가루병, 잎 위에 피는 하얀 곰팡이 (2) | 2025.04.19 |
---|---|
바닷물이 밤에 빛나는 이유 (1) | 2025.04.18 |
닮은 듯 다른 제비와 칼새 (0) | 2025.04.18 |
무당벌레 = 마리아의 벌레 ‒ 이름에 나타난 문화 차이 (0) | 2025.04.17 |
가시박: 땅만 있으면 덮는 식물 (1) | 2025.04.16 |